저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낯선 환경에 던져지면 일단 소화가 잘 안 됩니다. 집안 내력이라 제 노력으로는 어쩔 수 없네요. 더군다나 제 성격상 스트레스에 굉장히 취약한 편이라 스스로 잘 오거나이징해서 스트레스 받을 상황을 최대한 줄이는 수 밖에 없지요.  하지만 이렇게 말도 안 통하고, 아는 이 하나 없고, 당장 머리 댈 공간도 없는 순간에는 저로서도 어찌할 방법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수돗물을 그냥 마시는 호주 특성상 물이 맞지 않았을 수도 있지요.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구구절절 변명을 쏟아놓느냐고 하신다면, 상당히 x팔린 경험을 공유하려고 합니다. 외국에서 겪은 에피소드 중 흔한 단골 소재와 마찬가지로 더러운 얘기입니다. 호주에는 시내 중심가에 종종 공중화장실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각각의 건물들이 화장실을 오픈해놓고 쓰는 것이 아니라 관계자만 쓸 수 있도록 되어 있어서 화장실이 귀한 탓입니다. 이 점은 우리나라만큼 잘 되어 있는 곳이 없더군요. 독일은 심지어 청결상태도 매우 구린데 공중 화장실 이용에 무조건 따로 돈을 받습니다. 이마저도 찾기 힘들어서 매우 불편합니다. 

 여튼 저는 이 외지 땅에서 소화불량과 설사를 동반한 매우 힘든 집 찾기를 이어나가던 도중 굉장히 급한 신호를 감지합니다. 호주의 따사로운 햇살은 이내 제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히게 만들었고, 제 다리는 x자로 꼬이기 시작합니다. 이 급박한 상황에 다행스럽게도 교차로 신호등 한 가운데에 위치한 공중화장실이 눈에 띕니다. 다행입니다. 간신히 들어갔는데, 굉장히 더러워서 낑낑대며 휴지로 일단 거사를 치를 수 있을 정도로만 치우고 엉덩이를 들이밀었습니다. 이 복통은 쉽사리 없어질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저는 최대한 릴렉스한 마음으로 정신을 집중했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잠이 들어버린 걸까요. 무언가 희미한 소리가 들려옵니다. 쓰레기차 후진할 때 나는 소리같은데...라고 생각하는 순간 공중화장실의 문이 스르륵 열리기 시작합니다. 아랍계로 보이는 남자의 큰 눈, 흔들리는 동공이 보이고 저는 이내 제 몰골을 기억합니다. 왔더ㅍ.... 오마이갓 아임쏘쏘리, 플리즈 클로즈 더 도어!!!!!!!


 ...... 그 땐 몰랐는데 이 공중화장실은 10분이 지나면 자동으로 문잠김이 풀리고 열리는 것이었습니다. 아 ... 그 아랍남자의 눈동자가 잠시 아래로 내려갔다 올라온 것이 왜 이렇게 잘 보였던 것일까요. 마치 슬로우모션을 보듯, 모든 게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누구일지는 모르겠지만 제 미래의 마누라도 보지 못 한 저의 거사장면을 낯선 아랍남자에게 허락했다는 이 모멸감과 수치심을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부디 여러분들은 이 사실을 잘 숙지하시고 장 건강에 힘써서 저와 같은 불상사를 겪지 마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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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때 당시 항공권은 편도로 70여만원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태어나 생전 처음 가보는 해외라서 요새는 눈 감고도 할 수 있는 항공권 결제가 무섭기도 했고, 뭐라도 혹시 잘 못 될까 싶어 조마조마했던 기억이 납니다. 더군다나 그 때는 영어가 컴플렉스였을 정도로 영어를 못하기도 했었으니까요. 그래도 무슨 깡이었는지 경유지인 홍콩을 여행해야 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어차피 경유하는 거 홍콩 언제 가보겠냐는 마음으로 3박 4일 일정을 짜기 시작합니다. 코즈웨이베이, 몽콕 야시장, 스타의 거리, 빅토리아 피크, 란콰이펑 등 주요 명소들을 위주로 일정을 짜고 숙소는 코즈웨이베이 MTR역 근처에 있는 예스인의 6인실을 잡았는데, 그냥 대충 잡은 것 치고는 꽤나 괜찮은 퀄리티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거기서 다행히도 중국 유학 중에 홍콩에 잠깐 여행 온 여자분들을 만났고 이것 저것 도움을 받았습니다. 저는 영어 벙어리였지만 그 분들은 영어도, 중국어도 잘 해서 여행을 잘 즐기시는 것 같았습니다. 역시 사람은 배워야 합니다. 

 혼자서 하는 첫 해외여행은 신기한 것 투성이에 즐거웠지만 혼자라서 외로웠습니다. 혈기왕성하던 20대 초반, 더군다나 군대 전역하자마자 온 것이라 더욱 사무치더군요... 그래도 그 때는 여행이 마냥 좋았어서 다 잊고 지낼 수 있었습니다. 예산은 숙소비 제외하고 약 25~30만원정도 썼던 것 같네요. 하루에 10만원이 조금 안 되는 꼴이니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보고 싶은 거 다 본 거 치고는 비싸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숙소는 약 1박당 3만원정도 수준이였는데, 항공료가 전혀 안 들었단 셈 치면 국내여행을 조금 호화스럽게 했다는 수준정도인 것 같네요. 여튼 만족스러운 여행이었습니다.


 호주, 정확히 말하자면 멜번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라탔습니다. 멜번을 택한 이유는 도시가 아름답고, 살기 좋으며 한국인들이 대도시치고 상대적으로 적다는 정보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대도시가 일자리를 구하기 쉽다고 들었고, 어학원도 잠깐 다닐 생각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선택했고, 그리고 첫 해외생활인데 시골에서 박혀 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되든 안 되든 일단 시작은 좋은 도시에서 하고 싶었고, 안 되면 지역이동을 하면 되지 라는 마음가짐으로 멜번을 선정했습니다. 나중에 돌아보니 전 역시 운이 좋은건지 굉장히 좋은 선택이 되었습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이쯤 되면 저만 유달리 운이 좋다기 보다는, 어떤 선택을 해도 실패하지 않도록 제가 상황설정을 좀 잘한 것 같기도 합니다. 물론 처음에는 이래저래 적응하느라 고생도 좀 했지만 결국에는 목표한 것들을 다 이뤘으니까요. 


 멜번에 도착한 이후에는 디스커버리 호텔이라는 백팩커에 묵었습니다. 에어컨이 없는 것만 빼고 직원도 친절했고, 가격도 저렴했으며, 조식도 제공해줘서 굉장히 만족스러웠습니다만, 제가 호주에 거주하는 동안 사장이 바뀌고 시스템이 바뀌어서 그냥 평타치는 수준의 백팩커로 바뀐 것 같더군요. 여튼 제가 멜번에 도착한 것이 3월 10일 정도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3박만 예약을 하고 왔습니다. 현지에 가서 상황을 보고 기간을 연장하면 되지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알고 봤더니 3일 뒤에 F1 그랑프리가 개최되는 바람에 멜번시내의 거의 모든 숙소가 만실이 되어버렸습니다. 영어도 못 하고, 아는 사람도 없는 제가 그 정보를 알고 있을리 만무하고 당연히 당분간 묵을 방을 찾는 것은 다시 저의 지상최대의 난제가 되고 맙니다. 


 게다가 당시 무슨 깡이었는지 노트북도 없이 해외에 나온 저는 일단 중고 노트북부터 마련했고, 호주바다라는 한인커뮤니티와 검트리라는 현지사이트를 열심히 검색하기 시작합니다. 당시에는 생전 처음 혼자 집을 구하는 것이였고 어떤 것이 좋은 집인지, 호주에 사는 한인들은 어떻게 생활하는지, 어디가 좋은 곳인지, 호주 현지인들하고 사는 건 어떨지 등등 하나부터 열까지 걱정투성이에 모르는 것 투성이에 엉망진창이였습니다. 지금의 제가 그 때의 저를 본다면 정말 등신같다라고 여기겠지만 태어날 때부터 모든 걸 잘하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우여곡절 끝에 백팩커를 3번이나 옮겨다닌 후에 다락방(?)같은 집을 구하게 됩니다. 


 외국의 연립주택은 지붕을 뾰족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아서, 맨 꼭대기 층의 방은 방의 절반에서 3분의 1정도의 천장이 비스듬하게 되어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제가 그 방에 살게 됐는데 약 3x3미터 크기의 방이었는데 천장이 비스듬하다보니 실제로 사용가능한 방의 크기는 1.5x3정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 방을 다른 남자분과 나눠서 써야 했으니 참 열악했죠. 더군다나 카펫은 언제 마지막으로 청소를 한 건지 알 수 없을만큼 더러웠습니다. 하지만 백팩커에 오래 있다보니 숙소비가 만만치 않아서 빠른 선택이 필요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시내의 한복판에 위치해서 꽤 유명한 공과대학 RMIT의 캠퍼스가 바로 건너 편에 있었고, 농구장을 이용하기에 편리했고, 주립도서관, 지하철 역, 대형마트 등이 가까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열악한 집이 위치만 좋다고 해서 방세가 당시 환율 적용해서 한 달에 55만원정도였으니(2인1실 쉐어) 어마어마한 방값이지요. 


 물론 2존에서 3존 정도로 나가게 되면 같은 값에 꽤 괜찮은 퀄리티의 독방을 쓸 수 있는데, 달마다 사용해야 하는 교통비도 만만치 않은 데다 시내로 왔다갔다 해야 되는 시간도 무시할 수가 없어서 위치를 최우선으로 고려하게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는 역시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선택하지 않은 미래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는 것이긴 합니다만...


 아, 백팩커에 머무는 동안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다음 Ep.7에서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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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부터 제 여정에 대해서 좀 더 디테일하게 적어볼 예정입니다. 글솜씨가 부족해 좀 지루하거나 늘어질 수도 있으니 양해부탁드립니다. 

 추위가 시작되는 10월 말, 저는 군대를 전역했습니다. 바로 학교를 복학할 수도 있었지만, 저는 앞서 언급했다시피 고등학교 때 친구에게 호언장담을 해놓았던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갈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군대에서부터 쥐꼬리만한 월급을 조금씩 모아서 약 70만원 정도를 모아서 나왔으나, 전역축하파티며 그 동안 못 만났던 친구들을 만나다 보니 1주일만에 다 써버리고 말았죠. 그래도 서울 쪽에서 학교 친구들은 거진 모두 만났었고 이제 고향에 내려가서 고향친구들을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어렸을 때부터 같은 고향 가까운 곳에 살면서 저를 아들처럼 챙겨주셨던 친척분이 한우집을 운영하시는데 내려와서 일을 도와달라는 제안을 하셨습니다. 저에겐 최상의 시나리오였습니다. 3개월 정도 후에 호주로 출국할 계획이었고 최대한 초기정착자금을 많이 모아서 갔어야 했기 때문이죠. 숙식제공이었어서 받는 월급은 거의 모조리 세이빙을 할 수 있었죠. 거기에서 머물며 고향 친구들과 간만에 정기적으로 만날 수 있던 건 덤이었죠.


 하지만 생각만큼 일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친척분이 가게의 거의 모든 운영을 한순간에 저에게 맡겨버리신 탓에 저는 군대보다도 더 빡센 생활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이제 갓 군대를 전역하고 식당운영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까까머리 군인이 갑자기 나타나서 매니저역할을 하는 것에 대해 종업원들의 반발 아닌 반발도 있었고, 식료품을 공급받는 업체들과의 가격협상과 기타 협력에 있어 나이 때문에 받는 불이익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종업원들의 정기휴가를 결정하는 데 있어 예전과는 달리 다들 이기적으로 행동했고, 저의 중재를 무시하고 저의 친척인 사장님과 직접 의논하려는 경향이 많았습니다. 저는 나름 친척분이 저를 믿고 맡기신 일인데 자꾸 일을 해결 못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종종 갈등이 생기기도 했었죠. 거래처 사장님은 너가 어려서 모르는 거다는 식으로 저에게 바가지를 씌우신 일도 종종 있고, 배송우선순위에서 자꾸 밀려나기도 했습니다. 안 그래도 일이 서툴러 주문이 잘 못 들어간 경우도 왕왕 있었는데, 일장훈계를 듣는 건 예사였습니다. 세세한 예를 들지 않더라도 일개 직원이 아닌 매니저로서 식당을 운영해나가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해보신 분들은 다들 아실겁니다. 인수인계란 건 없었고 처음부터 다 부딪히며 알아갔습니다.


 제 성격상 대충 일을 처리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매일 12시간 이상씩 3개월동안 휴일은 단 2일. 신정과 구정 등이 껴 있었지만 식당일을 하느라 쉬지 못 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식당주변청소, 새벽에 배송된 식재료 점검, 창고정리하며 부족한 식재료 점검, 예약점검, 기타 무거운 물건들 옮기는 건 모두 제 몫이었습니다. 식당운영시간엔 거의 계산대에서 계산을 위주로 하고, 바쁠 때는 서빙, 정육점에서 고기손질까지 도맡아 하며 멀티플레이어로 거듭납니다. 구정 때는 500포기가 넘는 김장을 돕느라 어깨가 빠지는 줄 알았습니다. 김장이 이렇게 힘든 일인 줄 알았으면 어머니께 김치투정따위는 하지 않았을 겁니다. 3일을 꼬박 김장을 하고 나니 군대를 다시 가는 것만큼 하고 싶지 않은 일이 되더군요. 


여튼 다사다난한 3개월을 마치고 나니 저는 식당운영을 꽤나 잘하는 젊은 요식업계의 떠오르는 샛별(?)이 되었고, 김장도 할 줄 아는 한국의 신남성이 되었으며, 소고기를 부위별로 손질할 줄도 아는 기술자가 되었고, 무엇보다도 호주로 떠날 자금을 차고 넘치게 모았습니다. 통 크게 100만원어치의 최상급 A++한우를 친척들과 가족들에게 선물로 투척하고 전 호주로 향하는 비행기티켓을 끊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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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어떤 선택지들이 있는 지 알아봤습니다. 축구계에는 많은 직업이 있지만 체육을 전공했다거나 축구계에 인맥이 있다거나 혹은 선수출신이 아니라면 진입장벽을 뚫기란 쉽지 않아보였습니다. 특히 한국에서는 말이죠.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하고 있었으므로 우선 도전한 곳은 호주였습니다. 수소문하고 구글링한 끝에 축구 코치 자격증과 심판 자격증을 땄고, 무작정 소규모 축구클럽들을 찾아가서 코치를 하고 싶다고 이력서를 돌렸습니다. 하지만 호주에서 소규모 축구클럽이란 정말이지 친목단체에 불과합니다. 축구 자체가 호주에서는 비인기 종목이거니와 많은 사람들의 인식에 유소년 코치는 자원봉사 내지는 용돈벌이 수준의 직장일 뿐이더군요. 취미로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언어적으로도 부족하고 경력, 실력 모두 뒤떨어지는 제가 할 수 있는 건 보조코치로서 훈련세션을 돕는 잡다한 일을 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물론 보조코치 일을 하면서 언어적으로도 많이 늘었고 좋은 사람들도 많이 배웠고, 축구 코치라는 것이 이런 것이다라고 하는 관념도 생기고 했습니다만, 아무래도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예, 이번에도 환상과는 다른 현실을 깨닫게 되었네요.


 이런 식으로는 비전이 없다고 생각한 저는 다른 옵션을 알아보게 됩니다. 한국은 선택지에 넣지 않았습니다. 저의 선입견에 불과합니다만 한국에서의 축구계는 후지고 폐쇄적이며 열악합니다. 그 곳에 저의 열정과 삶을 바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막연히 외국을 생각했지만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저희 집은 부자가 아니라 깡촌에 살았습니다. 호주 워홀을 통해 꽤 많은 수입을 벌고 있었지만 외국에서 혼자 생활하면서 유학자금을 모으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요. 더구나 살인적인 렌트값을 자랑하는 호주 멜번에서는요. 이리 저리 알아보다가 유럽 축구 강국 중 독일의 대학시스템은 외국인에게도 무료임을 알게 됐습니다. 이 때 다른 것 재지 않고 바로 쾰른체육대학교에 입학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독일에서 최고의 체육대학일 뿐만 아니라 학문적으로 스포츠에 접근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저는 실기위주의 한국체대에도 회의를 품고 있었기 때문이죠. 스포츠는 정말이지 실무와 학문의 조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공부 못 하고 운동만 잘하는 사람이 체대를 간다는 편견도 정말이지 폭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렸을 때의 저에게도 그런 편견이 어쩌면 제가 체대로 진학하는 걸 막았을 지도 모르겠네요.


 여튼 독일로 가기로 마음 먹고 나니, 현실적인 문제가 다가왔습니다. 학비는 공짜라고 하더라도 독일어는 영어와는 달리 단 한 번도 배워본 적 없기 때문에 어학원에 다녀야만 했습니다. 독일어를 못 하는 상태에서는 독일에서 알바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최소 어학기간인 1년동안의 생활비를 벌어야만 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1천만원에서 1천 2백만원정도를 학원비와 생활비, 초기정착비로 보더군요. 그래서 미친 듯이 일을 많이 하고, 돈을 아껴서 저축을 하게 됩니다. 이미 워홀 1번째 해에 벌어둔 돈은 호주 일주와 동남아 여행, 엑티비티, 축구 자격증, 강습, 독일어 과외 등으로 모두 소진한 상태라 2번째 해에 차곡차곡 돈을 모아서 이 자금을 마련했습니다. 정말 힘들었는데 이것에 관한 얘기는 차차 천천히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독일행을 결심하고 약 10개월 후, 한국에서 약 1개월의 휴가를 가지고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싣게 됩니다.


 Ep.4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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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연하게도 판검사는 되지 못 했지만 나름 황새 따라가려고 노력한 끝에 서울에 소재한 그저 무난한 대학교에 다니게 됐습니다. 사실 경영학과는 먹고사니즘에 입각한 선택이었지만 당시에는 팀플레이에 적합한 협동력을 지닌, 셈에 밝은 문과생으로서 완벽한 적성콜라보라는 허무맹랑한 최면을 스스로에

게 걸었었죠. 그렇게 술의 도움을 빌어 환상에서 깨어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던 대학 신입생 시절은 군입대로 인해 한 순간에 깨어집니다. 


 강원도에는 쓰레기가 하늘에서 내린다. 멧돼지가 호랑이만 하다, 나방이 팅커벨이라더라 하는 말들은 선생님 말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는 말보다 훨씬 현실에 가까웠습니다. 가끔 눈 덮인 아름다운 태백산맥을 바라보며 나는 춥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언을 떠올리기도 했죠. 


 아, 참고로 저는 고등학교 때 영어를 잘 하던 친구에게 열등감에 사로 잡혀 알지도 못 하던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군대전역하고 무조건 가겠다고 호언장담한 것을 잊지 않고 시행한 사람입니다. 역시 저는 호주워킹홀리데이는 청춘의 특권, 세계를 누비는 열린 청년들의 아름다운 이야기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호주 땅을 밟았지만 아시다시피 호주워홀 다녀온 여자랑은 결혼도 하지 마라, 제가 태어나 자란 시골보다 더 시골인 곳에서 양파나 감자를 따는 남자들, 대충 살다 인생역전을 노리고 카지노에서 인생을 허비하는 사람들이 더 현실인 것을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다행인 것은 그런 안 좋은 시선 속에서도 저는 아름다운 자연경관도 보았고, 자기가 진정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그걸 통해서 진정 행복해 보이는 삶을 사는 사람들도 보았다는 점입니다. 난생 처음 사회초년생 치고는 큰 돈도 만져보고, 반복된 회사생활에 지치다 보니 나는 누구인가, 난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가 걱정이 되더군요. 다행스럽게도 곧 축구로 먹고 살면 정말 좋겠다라는 생각이 스쳤고, Why not?을 외칠 수 있을만큼 젊었습니다. 


----Ep.3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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